어떤 사람은 좋은
재능을 가지고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평탄한 삶을 사는 가하면,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재능도 좋지 않고 삶의 환경 또한 척박해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다양하게 이해하고 설명하여 왔습니다.
삶의 행복과 불행을
이해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 중의 하나가 삶의 행복과 불행을 운 (luck)과 연관시켜 이해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복권에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얻으면,
운이 좋다고 말합니다. 또 반대로 나쁜 일이 생기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혹은 심각한 육체적, 경제적 고통 가운데 있게 되면 운이 나쁘다고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행복과 불행, 고통을 우리의 도덕적인 삶과 연관해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당하는
재난이나 어려움을 두 가지 방식으로 죄와 연관시켜 생각해왔습니다.
첫째로 유대인들 중에는
에스겔 18:20에 근거해서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보응으로 재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반대로 착하고
의로운 삶은 부와 행복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아가 이들은 현재의 도덕적인 삶과 자신들의 현재의 삶의
결과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이것을 전생의 삶과 연결시켰습니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유아 때부터 선천적인 질병이나 장애를 가지고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은 전생에 지은 죄 때문이며, 반대로 특별한 도덕적 선행도 없이 부유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생에서 행한 공덕의 보답으로 이해했습니다.
두 번째로 유대인들
중에는 출애굽기 20:5말씀에 근거해서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과 재난의 원인을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자녀나 후손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부모나 조상이 지은 죄의 보응, 또는 죄의
결과 때문이며, 반대로 후손들이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은 조상들의 공덕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요 9장에서 선천적인 맹인의 고통을 환생설과 유전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시키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심이라” 주님은 맹인이 겪는 고통의 원인보다는
그를 통해서 나타나게 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보냄을 받은 사람들의 사명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좌절하거나 분노할 것이 아니라,
나의 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나를 통해서 일하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는 믿음만 있다면, 그래서 재난과 고통마저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믿게 된다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고난 조차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바꾸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