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날 뉴욕시 전체에 정전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고 모든 사람들이 테러의 공포를 생각하며 초긴장이었습니다. 더운 여름, 전기로 움직이던 모든 기계들이 멈췄습니다. 달리던 전철이 섰고, 버스도 기름이 떨어져 운행이 중단됐습니다. 대부분의 주유소가 문을 닫았지만, 아날로그 형태의 주유시설을 갖춘 주유소만은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리는 차들로 시끌벅적 했습니다.
태초에 인간은 대자연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풀과 나무와 꽃으로 둘러싸인 인간은 그들과 하나였기에 꽃가루 알레르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연이 녹색으로 덮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정신을 못 차립니다. 아날로그적으로 운행되는 대자연의 질서 앞에서 디지털 과학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미국생활 10년째 접어들면서 저에게도 알레르기가 찾아왔습니다. 올해는 코에서 피가 나고 코가 막혀서 숙면을 취하지 못합니다. 디지털 과학이 아날로그 자연에 역행함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지난 목요일 새벽, 목회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한다는 것을 저도 경험했습니다. 여지껏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뒤척이다 놀래 눈을 뜨니 밖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6시 5분이었습니다. 살펴보니 알람을 맞춘 핸드폰 전원이 완전히 나가 있었습니다. 취침 전 충분히 충전된 것을 확인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3D니 4G니 하는 시대를 살면서 저 역시도 디지털문명에 의지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어린 시절 눈을 뜨면 벌써 할아버지는 불을 지펴서 지푸라기를 삶아 소여물을 만들어 먹이시고 소와 함께 논에 나가셨습니다. 부엌장작불도 이미 그 기세가 다하고 어린 제가 들어가고도 남는 가마솥에서는 숭늉이 끓고 있었습니다. 자연을 벗삼은 우리의 조상들은 알람이 없어도 자연과 하나된 생체시계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눈을 떴는데, 저는 어느덧 과학에 의존하다 이처럼 막히고 무딘 존재가 됐습니다. 다시 아날로그적 민감성을 회복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Remain Bl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