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담은 김치를 땅 속에 묻다가 문득 동치미 국물 생각에 젖어듭니다. 연탄을 떼던 시절 친척 집에 놀러 가서 하루 묵게 되었습니다. 새벽 나절 잠에서 깼는데, 정신이 혼미했습니다. 어른들은 다른 방에서 주무셨기에 괜찮으셨는데, 저는 연탄까스를 맡아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코를 땅에 대고 흙냄새를 맡았습니다. 살려고 킁킁 거리는 제 모습을 본 친척 어른께서 얼른 동치미 국물을 떠오셨는데, 목구멍을 타고 참으로 시원하게 내려갔습니다. 그때부터 저에게 동치미는해독약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너도나도 묵은지 타령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묵은지라는 말은 잘 쓰지 않았습니다. 사실 묵은지는 전라도 사투리입니다. 표준어로는 묵은 김치라고 해야 하겠지요. 제 기억에 묵은지하면 김치가 오래 되어서 군내가 날 때 묵은지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수년 간 잘 숙성시킨 김치를 묵은지라고 하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군내가 없고 새콤하면서 아사삭 거립니다. 겨울철 땅에 묻은 항아리에서 꺼낸 살얼음낀 김치 맛보기는 눈과 코에서 시작됩니다. 빨갛게 잘 밴 양념이 눈에 들어오고, 잘 숙성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지금도 저는 아내가 김치를 한 포기 꺼내 썰면 옆에서 두어 쪽 얻어 먹는데, 그 맛은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에게 묵은지는 추억으로 먹는 김치입니다. 어린 시절 항아리에 쌓인 눈을 치우고 뚜겅을 열어 김치를 꺼내시던 어머니의 손길, 맨손으로 살짝 언 김치를 싹뚝 썰어 입에 넣어 주시던 어머니의 눈길… 너도 나도 묵은지 타령하는 것은 그만큼 옛시간이 그리워서가 아닐까요?
성경적 치료를 주창한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Paul Tournier 박사는 “타락한 인간의 내면 속에는 자리상실과 자리열망의 욕구가 숨어있다”고 합니다. 도시화와 세계화의 물결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향을 떠난 자리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나 도시와 타국에서 인간은 떠나온 자리에 대한 상실감을 안고 삽니다. 그래서 묵은지와 같은 고향의 음식을 통해서라도 사무친 그리움을 달래려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잃어버린 그 자리에 대한 열망을 묵은지와 함께 씹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잃어버린 고향 에덴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에덴에 대한 상실감을 달래는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수천년 전의 추억으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배신의 역사와 은혜의 역사를 모두 생각나게 하며, 나 현주소를 살피게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Remain Bl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