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무를 생각하며…
04/10/2011
대학 다닐 때 가장 재밌게 공부했던 과목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입니다. 4학년이 되면 채플사회를 보게 됩니다. 제가 사회보던 날 히브리 대학에서 가르치시는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본문은 신명기 6장 4~5절이었습니다. 저는 묵상기도 연주가 끝난 후 4절을 히브리어로 읽었습니다. “쉐마 이스라엘 야훼 엘로헤누 야훼 에하드!” 설교시간이 되었습니다. 강사로 오신 목사님은 설교를 시작하면서 본문을 히브리어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과 제가 읽은 히브리어 중 다른 단어가 하나 있었습니다. 4절에 나오는 여호와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야훼”로 읽었고, 그분은 한국어로 “주(Lor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도나이”로 읽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은 너무나도 거룩한 분이셔서 감히 죄인된 인간이 그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야훼에 해당하는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를 발음하기 보다는 ‘주’라는 단어로 교체해서 읽습니다.
그러나 거룩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아도나이로 부르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삶에는 거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마가복음 11장에 등장하는 ‘저주받아 뿌리까지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처럼 되버립니다(v12~14 & v19~26).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면하려면 무화과 나무를 통해 증거된 두 단어 ‘믿음’과 ‘용서’의 관계를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야고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믿음과 행함이, 바울에게서 찾아지는 소중한 두 단어로 말하자면 칭의와 성화가 우리의 삶에 있어야 합니다. 이때에 비로소 우리는 거룩한 백성(구분된 삶을 사는 백성)이라 일컬을 수 있지 않을까요? Remain Blessed!